영화는 영화다 - 쉬운 소재는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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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진(晉)의 예양은 죽기 전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이 협객의 정신적 후손들 중 한명인 주윤발은 2천 5백년이 지나 ‘영웅본색’에서 '강호의 의리'를 운운한다. 그는 삼합회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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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낭인집단이자 준군사조직인 신선조는 '무사도'를 외치다 역사에서 패자로 사라졌다. 그런데, 야쿠자의 선조인 이들은 '바람의 검심'으로, NHK 드라마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일제시대 종로에서는 상인들의 '보호비' 갈취 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두고 두 집단이 맞붙었다. '하야시'를 '김두한'이 이김으로써 '장군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졌다. 전설은 이후 국회의원이라는 수직상승과 추락이라는 과정을 추가하면서 비장미를 더욱 드러냈다. 그리고 ‘이대근’을 거쳐 ‘박상민’이라는 배우를 빌려 은막을 장악했다. 비합법적인 무력집단인 협객-낭인은 이렇게 영화와 드라마에서 번듯한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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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한국으로 한정시켜보자. 1960년대 '맨발의 청춘'에 나온 건달은 말 그대로 날건달이다. 주인공의 죽음도 길바닥에서 이루어진다. 이후, 1990년대 '장군의 아들' 시리즈까지도 협객인지 건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게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다. '김두한'과 '하야시'라는 대결 구도는 최소한의 흥행요소인 한일 대결을 상정했지만, 결국엔 '삥뜯는' 이권을 그래도 조선인이 가져야한다는 낮은 수준의 결론만을 가지고 있었다. '김좌진'이라는 아버지는 흐릿하다. 아버지의 나라는 더욱 없다.

그런데, '시다바리'의 비장미를 전면에 내세운 '친구'가 성공했다. 1970년대 성장의 뒤편 주인공을 깡패라고 지목한 이 영화에서 조폭의 대립은 우정을 깔고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친구를 죽인 한편의 조폭은 변명 않고 재판을 받으며 영화는 끝난다. 이 점은 조폭이 민간인인 의사와 사랑을 나눈다는 '약속'이나 사회적인 갈등의 조정자로 전면에 등장한 '두사부일체'의 어설픈 사회참여와는 구분되는 지점이다. '약속'은 조폭에게 일반적인 삶이 가능할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그들에게 씌워진 험악한 이미지를 낭만적으로 바꾸었다. 믿는 것이라고는 돈과 주먹밖에 없는 깡패가 마지막에는 성당에서 여친에게 약속하고 자수한다는 설정자체가 극적인 개과천선이 가능하리라는, 야수에서 왕자님으로 변할 수 있다는 어설픈 낭만주의의 틀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반면, '두사부일체'는 노무현도 어쩌지 못하는 사학비리를 음지에서 활약하다 양지에 발가락하나 걸친 '고딩' 조폭이 응징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형 '헬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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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이 두 부류와는 다르다. 철저하게 조직 내부의 사건에 집중한다. 극장안에서 학교간의 난투극에서 한편이었다가, 다시 핵분열을 거쳐 두 조직의 중간보스로 성장한 친구의 삶이 그랬고, 그러다 둘 중 한명이 죽어야 된다는 조폭 논리를 좇아 친구를 죽이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민간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화자로 감독의 페르소나가 있긴 하지만. 조직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한명의 비장한 죽음으로 다시 세친구가 연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의 매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국 조폭영화의 '로망'을 만들었다. 이후에 제작된 영화들은 '친구'에 대한 울궈먹기였다. 반면, '조폭마누라' 시리즈는 이와는 달리 그들의 쌈마이 정서를 이용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조폭영화'는 한국 영화의 소재 제한을 일정부분 뛰어넘는 성과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소재의 '블루칩'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조폭영화의 흐름에 대한 불온한 딴지는 '유하'가 제기했다. 이미 90년도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던 시인 '유하'는 '결혼은 미친짓이다'와 '말죽거리 잔혹사'로 정식 감독이 되었고 차기작으로 '비열한 거리'를 발표했다. 이 영화의 소재는 조폭세계와 영화판의 공존에 대한 물음이다. 미성숙한 행동대장 '병두'와 조폭영화의 소재를 찾기 위해 어둠을 기웃거리는 영화감독 '민호'의 관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민호'는 실제 살인 사건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 대박을 터뜨리지만, 이후 살해 위협을 받다 자신의 목숨 연명을 위해 친구이자 취재원인 '병두'를 배신한다. 이때, 살아남는 것은 '민호'인데 관객의 심리는 '병두'에 기대어있었다. 이는 영화가 조폭의 미화에 기여한다는 당시의 비판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었다. '비열한 거리'에 이르러서는 아직 영화계가 외부의 비판과 내부의 고민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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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개봉한 영화 '영화는 영화다'는 이런 고민에 대해 더 파고든다. 김기덕이 각본을 쓰고, 그 조감독이었던 장훈이 연출한 이 작품은 영화가 가진 욕망인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을 '조폭'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변변치 못하지만 주인공을 도맡아하는 싸움꾼 '수타'는 제대로 된 연기자가 되기 위해 실제 주먹질을 감수하면서 영화를 완성하려 하고, 한 조직의 행동대장인 '강패'는 심심한 삶이 지겨워 예전에 잠시 기웃거린 영화판에 발을 담그려한다. 영화내의 설정으로는 이 강패는 예전에 '초록물고기'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변변한 얼굴 외에는 국어책 발음과 잘빠진 몸매, 주먹질이 배우로서 가진 전재산인 '수타'는 '연기파'가 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망가뜨린 영화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실제 개싸움을 감수하려 한다. 상대는 룸살롱에서 잠깐 맞닥뜨린 조폭인 '강패'. '리얼'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영화감독과 같은 심정으로, 한편으로 두려워하면서(강패를 캐스팅하면서 이런 대사를 한다. "결론은 시나리오대로.......") 그를 끌어들인다. 영화 속 감독도 같은 심정이다. 그는 화끈한 장면을 원하지만 제대로 피보기를 두려워한다. 결국 감독이나 수타는 좀 더 100 퍼센트에 가까운 허구를 원하는 셈이다. 반면, 영화 출연도 놀이나 다를 바 없는 강패에게 현실과 비슷한 허구는 없을 뿐이고, 제대로 된 쌈질을 합법적으로 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도 영화를 통하면 멋지게 포장되면서.

이렇게 설정한 영화 속 영화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의 원래 목적인 작품 속 액자를 거부한다. ‘수타’가 가져온 ‘강패’라는 액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선다. 애초에 제시된 역할인 영화 속 장치가, 즉 필요에 의해 외부에서 가져온 소재가 영화의 제작 전반을 통제하려 하면서 갈등이 증폭된다. 수타는 강패의 연기 중단 선언에 속수무책이고, 감독은 다시 돌아온 강패가 밉지만 거부하지 못한다. 소재에 장악된 현장과 인물들이 휘청거리다 뻘밭에서 찍은 혼신의 연기덕분에 영화는 완성된다. 하지만, 그 직후 살인사건 때문에 순식간에 액자 바깥의 상황 자체가 무화되었다. 애초의 시나리오대로 수타는 영웅이 되지만 살인 사건의 공범 내지는 방관자가 되면서 액자 바깥의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플레이어’처럼 영화찍기에 대한 고민을 안고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 보다 절실한 현실인 ‘조폭’의 활약에 대해 몰두하여 나름대로의 거울이 되려했다. 어쩌면, ‘대부’의 초반 영화제작자 침실의 시퀀스를 확대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franz

2008년 10월 13일 22시 41분 2008년 10월 13일 22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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